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브 루스 (문단 편집) === 양키스 이적: 신화가 되다 === >'''[[광란의 20년대]], 그 시대 최고의 아이콘''' 1920년대는 여러모로 근현대 미국의 절정기였고 21세기 현재에도 미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아이콘들이 많이 나왔다.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세계금융의 중심과 주식의 활황[*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1929년 [[대공황]]의 도화선이었다.], [[라디오]]의 보급, [[잭 뎀프시]]와 타니의 세기의 대결(1927), [[찰리 채플린]] 등 [[헐리우드]] 영화의 1차 전성기, 그리고 [[양키스]]에서 뛰던 베이브 루스가 이런 아이콘으로 꼽힌다. 1920년대의 베이브 루스는 단지 [[MLB]]의 레전더리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미국 스포츠 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였다. 루스를 처음 트레이드 할 당시 보도한 뉴스에서 양키스가 루스를 투수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내세웠지만 타자로서 차원이 다른 능력을 보여줬던터라 이내 타자로 완전히 전향시키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이는 '''야구의 역사를 바꿨다.''' 1920년, 이적 첫 해에 홈런 54개를 기록하며 '''타자로서의 풀타임 첫 해'''였던 이전 해에 자신이 기록했던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 29개를 재경신했다. 루스 이전까지 메이저 공식 기록은 네드 윌리엄슨의 27개, 아메리칸 리그 공식 기록은 가비 크라바스의 24개. 풀 타임 첫 해에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을 갱신하고 2년째에 25개를 추가해 2배 가까이 기록을 늘려놓은 것이다. 1920년의 홈런 순위를 보면 54개의 루스 다음 2위는 19개의 조지 시슬러다. 그 다음 해엔 59개의 루스 다음 24개를 친 켄 윌리엄스와 밥 뮤젤이었다. 한 마디로 루스는 '''[[넘사벽|혼자 다른 세상에 있었다]].''' 1921년에 우승 후 팀 동료들과 함께 친선경기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5월까지 출장정지를 받은 루스는, 복귀후에도 관중석 난입 후 퇴장, 부진 등으로 주장 자리까지 뺏기며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다. 당시 그는 110경기 출장 후 타율 3할1푼5리, 35개의 홈런과 99타점이란 훌륭한 성적을 냈지만, 전 시즌의 괴물같은 성적에 비하면 초라한 결과[* 지금 35홈런 정도를 치면 리그 홈런왕 레이스에 명함을 내밀 수 있고, 가뜩이나 루스가 110경기밖에 안 나왔음을 감안하면 35홈런은 대단한 것이다. 근데도 초라하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베이브 루스가 얼마나 잘했는지를 알 수 있다.]였고 월드시리즈에서도 17타석 2안타에 그치며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1923년은 그에게 설욕의 해였다. 루스는 커리어 하이 3할 9푼3리란 어마어마한 타율과 함께 또다시 홈런왕(41개)이 되었으며 월드시리즈에서도 맹활약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이 해 루스의 fWAR은 '''MLB 역사상 단일 시즌 1위'''이다. 무려 15.0. 1924년에도 홈런왕 자리(46개)에 오르며 타율왕까지 석권하지만 줄부상으로 스쿼드의 뎁스가 얇아진 양키스는 우승에 실패하고 만다. 1923년과 1924년에 몸관리에 성공했던 루스지만 원래 음주와 문란한 성생활 등 방탕한 생황을 즐겼고, 재능을 믿고 연습을 게을리한 탓에 1925년에는 몸매 관리에 실패하며 체중이 무려 260파운드(120kg)가까이 나가게 된다. 이 시즌에 그는 실제로 병이 나서 팀 이동 중 기절해 입원했으며, 사망설까지 나온터라 일부 신문은 그가 사망했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결국 시즌 도중 호텔방에서 기절한 채로 발견되는 등 건강 상태가 최악이었던 25시즌에서 루스는 98경기만 출장하면서 .290, 25개 홈런이라는 양키스 선수로 최악의 기록을 남겼으며, ~~이 정도면 A급 타자 기록 아니야? 루스잖아~~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꼴찌에서 두 번째에 그친다. 절치부심한 그는 오프시즌에 작정하고 몸을 만들어 온다. 당시 양키스에 대한 기대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지만 제 컨디션을 되찾은 루스는 이런 예상을 비웃듯 홈런왕을 재탈환하며(47개) 타율 3할7푼2리, 146타점을 기록한다. 페넌트 레이스를 우승한 양키즈는 당시 역대 최저승률 내셔널 리그 우승자였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를 월드시리즈에서 쉽게 꺾고 우승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4차전 당시 홈런 세 개를 친 루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패배한다. 당시 월드시리즈는 지금 유명해진 소년과의 "약속 홈런"이 나온 시리즈이다. 그가 병상에 누워있던 11살 조니 실베스터를 위해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지킨 것. 비록 아쉽게 우승에 실패했지만 루스가 건재했다는 것을 널리 알린 것만으로 26년은 대성공이었다. 또한 이 시즌 도중엔 1923년에 19세의 나이로 핀치 히터로 데뷔한 이후 두 시즌간 겨우 23경기 출장에 그친 유망주 [[루 게릭]]이 마침내 만개해 3할1푼3리에 16개 홈런, 112타점, 2루타 47개와 아메리칸 리그 1위인 20개의 3루타를 터뜨리며 든든한 조력자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도 컸다. 1927년, 루스의 기록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시즌 60홈런'''[* 리그 전체의 '''15%'''에 해당했다.]을 기록했고[* 이 기록은 1961년 [[로저 매리스]]가 61홈런을 치며 경신, 또한 이 당시에는 그라운드에 떨어져도 튕겨 담장 밖으로 넘어가면 홈런으로 인정되었지만, 루스의 홈런 중 바운드 홈런은 없었다. 오히려 당시엔 끝내기 홈런을 안타로 처리했는데, 이 때문에 홈런 1개를 손해 봤다.], 타율 3할5푼6리, 164타점에 장타율 7할7푼2리[* 70여년이 지난 2001년에서야 나온 [[배리 본즈|약즈]]의 괴물같은 기록 경신 이전까지 최고기록이었다.]를 기록했다. 한 마디로 생애 최고의 시즌. 루스와 [[루 게릭]][* 홈런왕 루스의 위대함 때문에 루 게릭의 괴물같은 기록이 묻히는 경향도 있는데, 루 게릭은 당시 [[https://www.baseball-reference.com/leagues/MLB/1927-batting-leaders.shtml|무려 47개를 때려내면서 3위 기록(30개)보다 아득히 많은 갯수의 홈런을 쳐냈다.]] 더 무서운 것은 양키스엔 공동 8위로 18개를 쳐낸 토니 라제리까지 있었으며, 1,2위인 루스와 게릭이 쳐낸 홈런만 합하더라도 107개로 리그 2위인 뉴욕 자이언츠의 전체 팀 홈런과 2개 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양키스가 쳐낸 홈런은 그 자이언츠조차 압살하는 158개로, 자이언츠의 거의 1.5배에 가깝다. 괜히 창작물 등지에서 "27년 양키스"가 전설의 강팀으로 통하는게 아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홈런 총갯수인 922의 거의 3할에 가까운(정확히는 28.9%) 홈런 갯수가 양키스와 자이언츠 경기에서 나왔으니 뉴욕 팬들은 야구 볼 맛이 났을 듯.], 이른바 살인 타선(murderers' row)[* 이 원투펀치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냐면, 루스를 제외해도 당시 게릭이 기록한 47개보다 많은 홈런을 기록한 타자는 1930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즉, 1920년대 최고의 타격 퍼포먼스를 보여준 타자 2명이 한 시즌에 나온 괴물같은 해였던 것이다. 게릭의 이 시즌 기록 역시 훌륭하다 못해 눈이 부실 수준이지만 루스의 다른 시즌들이 있기 때문에 1920년대를 통틀어 전체 2등의 기록은 아니다.]을 앞세운 27년의 양키스는 별명대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스포츠 팀 중 하나로 회자된다. 2위 뉴욕 자이언츠의 1.5배, 리그 전체의 3할에 가까운 홈런수를 때려낸 이 강력한 팀은 당시 아메리칸 리그 기록이었던 110승을 거두고 2위를 19경기 차이로 제치고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했다. 월드 시리즈에서 이들은 피츠버그 파이러츠를 4대0으로 '''스윕해 버리고''' 손쉬운 우승을 차지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파이러츠 선수들은 양키스 선수들이 1차전을 앞두고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공이 계속 장외로 나가는 광경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고도 한다. 루스가 세운 60홈런의 위대함은 말이 필요없었다.[[https://www.baseball-reference.com/leagues/MLB/1927.shtml|양키스가 속한 아메리칸 리그의 '''팀 홈런 2위'''가 56개를 기록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였으며 리그 전체적으론 베이브 루스보다 많은 홈런을 때려난 팀이 단 넷에 불과했다.]] 또한 당시 팀당 평균 홈런 갯수는 58개였으므로 오늘날의 팀당 평균 홈런(2018시즌 기준 186개) 기준으로 보면, 오늘날로 치면 혼자서 거의 '''190개'''를 때린 수준의 임팩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체력적 한계 때문에 실제론 누구도 190개를 때려내긴 사실상 불가능하겠지만, 그만큼 상식 밖의 수치였다는 소리다. 내셔널리그 홈런왕은 루스의 딱 절반인 30개를 때려낸 [[핵 윌슨]]이었다.[* 20년대 후반을 빛낸 강타자였지만, 자기 관리 실패로 인해 일찍 은퇴한 비운의 타자로, 1930년 시즌에, 80년 넘게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단일 시즌 최다 타점 기록인 191타점을 기록했다.] 여담으로, 60홈런을 치고 나서 더그아웃에 돌아올 때 이런 말을 남겼다. "'''60개야 60개!! [[로저 매리스|어떤 XX]]가 이 기록 깨는지 보자고!!(Sixty! Let's see some son of a bitch try to top that one!!)'''" ~~정작 저 말을 남긴 루스는 생전에 저 기록을 누가 깨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신체 능력과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감독이었던 조 매카시와 대립이 불거지기 시작, 1934년에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자, 양키스는 루스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시킨다. 마지막 시즌은 35년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뛰었지만 당시 풀타임 선수가 아니라 팀 운영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간지라 28경기에만 나왔다. 당시 타율은 1할8푼1리, 장타율은 4할3푼1리에 그쳤다. 비록 리그 22년차에 만40세, 몸이 완전히 망가진 이후였지만 워낙 클래스가 있는 지라 안타 13개 중 절반에 가까운 6개가 홈런이었다. 하지만 전성기에 비하면 명백히 떨어지는 성적이었다. 결국 루스는 시즌 도중 은퇴했다. 전성기 때에는 [[도루]] 시도도 자주 했었다. 단, 호타준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도루가 많았던 시즌도 도루자(盜壘刺)가 더 많았다. 1923년이 도루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17도루를 했지만 도루자가 21번이었다. 그가 도루 시도를 했던 것도 상대 투수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지, 클러치 상황의 득점 생산성을 올리기 위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통산 도루 성공률도 50%를 겨우 넘는 수준으로, 현대의 야구 연구자들이 말하는 의미 있는 성공률이 아니었다. 신체 조건과 주력은 문제가 없었으나 주루 센스가 형편없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최악의 부진을 겪은 1925년 이후 화려하게 부활했던 1926년 월드 시리즈에서 업셋을 허용하게 된 결정적인 플레이도 7차전에서 루스의 도루자였다. 다만 당시 양키스는 1점차로 지고 있었고 9회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모험을 할 필요는 있었다. 루스의 등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안타와 도루가 중심이 되었던 스몰 볼 야구가 홈런 등 장타 중심의 빅 볼 야구로 바뀌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등장 이후로 [[로저스 혼스비]], 핵 윌슨, [[지미 폭스]], 루 게릭 같은 20~30년대를 풍미한 슬러거들이 등장했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실제로 30년대부터 리그 홈런 갯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1929년까지는 홈런 45개를 넘긴 타자가 역사상 루스와 루 게릭 뿐이었으나, 당장 1930년부터 핵 윌슨이 무려 56개를 치며 루스를 제치고 홈런왕에 오른다. 그 다음시즌 게릭과 루스가 46개로 공동 홈런왕에 올랐으나, 32시즌엔 지미 팍스(1907~1967)가 무려 '''58개'''로 루스의 기록을 턱밑까지 쫓는 기록을 내고, 32,33년 2년 연속으로 루스를 2위로 몰아내고 홈런왕에 오른다. 물론 루스는 32년 당시 37세이자 무려 '''리그 20년차'''였기 때문에 2위만 해도 엄청난 것. 루스는 양키스에서 마지막이었던 34시즌엔 22개 홈런을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